3. 유비
유비하면 관우, 장비와 함께 '복숭아 나무 아래에서 형제가 되기로 맹세'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도원결의를 맺었다는 기록은 정사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도원결의를 맺었다는 기록은 정사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 맺어진 형제'라는 기록은 자주 등장하며 장비가 관우를 형처럼 모시고 유비의 의제라는 기록이 있다.
도원결의는 허구가 맞긴 한데, 이들이 의형제였다는 것은 기정 사실로 여겨진다.
1. 유비는 정말 무능력한 군주였을까?
여러모로 조조와 대비가 되는 인물이다.
천하를 통일하는 기반을 99%까지 닦아놓은적벽에서 승리만 했어도...조조와 달리, 주위에 최강무장들을 거느리고도 빌빌대는 모습은 유비 무능력설에 힘을 실어준다.
그러나 일면을 살펴보면 그 시대의 영웅임은 사실이다.
첫째로, 유비는 말그대로 '빈손'에서 시작한 인물이다.
황족이라는게 엄청난 메리트로 작용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들도 있지만, 진성 황족들이었던 유주자사였던 유우도 부하 공손찬에게 목이 잘려나갔으며, 양주자사였던 유요도 손책에게 쫓겨다녔다.
게다가 유비는 전한시대에 내려온 계보인데다가 방계이다.
후한시대에는 전한시대의 황족을 대우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황족의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돗자리짜고 신발팔면서 하루하루 연명하던 하류 계급이었다.
말 그대로 자금도, 근거지도 없어 전전하던 인물이었다.
말 그대로 자금도, 근거지도 없어 전전하던 인물이었다.
둘째로 항상 그의 주위에 인재들이 붙어있었다는 것이다.
삼국지 정사 최강의 무장 1번 관우는 천하의 절반을 차지한 조조의 후한 대접에도 그것을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유비를 따랐다.
삼국지 정사 최강의 무장 2번 장비 역시 유비와 떨어졌음에도 끝끝내 유비를 찾아 그를 따른다.
(삼국지 정사 최강 무장들이라는 소리는 결코 근거없는 소리가 아니다. 관우는 병사들을 단신으로 뚫고 들어가서 지휘관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장비의 장판파에서 단신으로 5천명의 병사를 막아선 것도 정사에 기록된 사실이다.
정욱전에서 나오는 '만인지적'이라는 칭호는 오직 관우와 장비에게만 부여된 칭호이다.)
서주 최고의 부자인 미축은 자신의 전재산을 털어서 유비를 보좌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여동생과 혼인시켰으며, 그의 동생 미방은 서주 6개 현의 왕(王)에 해당하는 최고 권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미련없이 그 자리를 버리고 유비를 따랐다.
(미축도 정사와 달리 연의에서는 엄청나게 과소평가 되는 인물이다. 과장이 있더라도 미축 집안에서 일하는 하인만 2만여 명이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상당한 재력가였다. 게다가 무재도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활을 그렇게 잘 쐈다고. 다만 인자한 성격으로 병사를 지휘하는 것은 유비가 반대했다.
미방 역시도 부유한 서주의 권력자 중 한사람이었으나 연의에서는 관우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무능력한 인물로 그려놨다.)
여타 제갈량이나 손건, 조운, 간옹 등등 근거지가 없이 떠도는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유비를 따랐다.
이게 대단한 이유는 위에 서술한 인물들은 어느 진영에 가더라도 한 자리는 해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조조 역시도 저들에게 관직을 수여하면서 자신의 진영에 묶어놓을 생각을 했었고.
그러나 종래에는 유비를 따랐다는 것을 보면 유비가 저들에게 얼마나 큰 신뢰를 보여줬는지 유추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셋째로 천하 통일을 99% 완료한 조조에게 한 방 먹인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적벽에서 조조에게 크게 한방 먹이면서 조조의 천하 통일 의지를 좌절시키며 이전까지 공세의 입장이었던 조조는 수세로 돌아서게 된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정 반대의 모습이다.
연의에서는 평원군 현령 시절에 독우가 유비에게 횡포를 부리자 장비가 이를 보고 매질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독우를 두들겨 팬 건 유비이다.
게다가 정사에서는 거칠게 행동했다는 기록들도 있다고 한다.
또한 청년 시절에는 마을 청년들의 우두머리라고 쓰고 건달 두목이라고 읽는다이기도 했으며, 자존심 쎈 관우와 거칠기로 소문난 장비에게 대놓고 혼냈다고 한다.
또한 백성들에게 온화하게 대했을 거라고 하지만, 촉을 차지하고 토목공사나 금주령을 시행한게 유비이다.
법령도 빡빡하게 시행해서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도망갔다는 기록도 나온다.
이런 이미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창천항로에 나오는 유비의 모습이다.
조조 중심의 삼국지를 그렸다.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작품.
그러나 유비는 배신을 많이 했다. 그것도 상당히 자주.
첫번째 배신의 대상은 공손찬이었다.
무명에 불과했던 유비가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준 것이 바로 공손찬이다.
자신의 휘하에서 싸우던 유비가 정계로 진출하도록 별부사마로 임명했으며, 평원에 군사를 주고 수비를 맡긴다.
이후 조조가 서주를 침공했을 때, 유비는 도겸에게 지원을 간다.
그러나 유비는 여기서 공손찬에게 돌아가지 않고 연락을 두절했으며 이후 공손찬에게 어떠한 말도 없이 서주목 자리를 차지한다.
이때 공손찬은 원소에게 신나게 털리고 있었으며, 유비는 공손찬이 망할 때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게 원소와 공손찬 대결 구도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이었는지, 공손찬의 수하였던 유비를 원소가 크게 칭찬했으며, 유비가 서주목에 오를 때 유비를 크게 지지했다는 것이다.
두번째 배신의 대상은 조조이다.
서주를 잃은 유비에게 좌장군이라는 직책을 수여하고 나갈 땐 유비와 같은 수레를 타고 다닐 정도였다.
근거지 없이 떠돌수밖에 없었던 유비를 파격적으로 대우했다.
그러나 이후 유비에게 군사를 주고 원술을 견제하도록 했으나, 오히려 서주를 침공하여 서주를 되찾는다.
물론 이후에는 조조의 대공세로 다시 서주를 잃고 원소에게 몸을 의탁하러 가게된다.
세번째 배신의 대상은 유장이다.
연의와 같은 소설에서는 '한의 부흥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포장하지만, 명백한 배신이다.
관우, 장비처럼 무예가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제갈량처럼 군략에 밝은 것도 아니었으며, 유파나 장완처럼 내정을 다스리는 능력도 부족했다.
그러나 유비의 진정한 능력은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에 있었다.
유비의 대단한 점은 그 인재들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할줄 알았다는 것이다.
물론 조조나 손권이 인재를 막 굴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유비군은 저 둘과 상황 자체가 달랐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본거지없이 이곳저곳 유랑했었으며, 가시적인 불안 요소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와해되지 않고 끝까지 유비를 따랐으며,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행동을 할 줄 알았다.
일례로 제갈량이 반골의 상이라며 위연을 죽이려 했을 때, 유비는 그를 반대했으며 후에는 한중 태수로까지 임명한다.
그 당시 관중을 공략할 수 있는 지역인 한중은 유비군에게나, 조조군에게나 굉장히 중요한 요지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운이나 장비가 한중 태수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이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위연을 한중 태수로 임명한 것이다.
물론 위연은 그 직책에 걸맞게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으며, 유비가 죽을 때까지도 반란은 커녕 유비에게 충성을 다한다.
그러나 저평가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저평가를 하게 만든 것은 유비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관우, 장비 사후 촉의 전력을 동원한 이릉 대전을 일으켰다.
이는 그나마도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촉오 관계가 원수지간으로 돌아섰을뿐만 아니라, 촉의 인재들이 여기서 몰살당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엄청난 인적 손실을 가져왔다.
이는 이후 북벌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제갈량이 무려 다섯 차례나 북벌을 감행하고도 실패하게 된 이유라고 본다.
인재가 멸망하다시피한 총력전이다보니 도박적인 수는 거의 불가능했으며, 언제나 정공법으로 상대를 뚫어야 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유비가 최후의 승자였다면 유비는 결코 저평가되지 않았을 것이며 새로운 평가를 받지 않았을까 싶다.
삼국지 정사 최강의 무장 1번 관우는 천하의 절반을 차지한 조조의 후한 대접에도 그것을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유비를 따랐다.
삼국지 정사 최강의 무장 2번 장비 역시 유비와 떨어졌음에도 끝끝내 유비를 찾아 그를 따른다.
정욱전에서 나오는 '만인지적'이라는 칭호는 오직 관우와 장비에게만 부여된 칭호이다.)
서주 최고의 부자인 미축은 자신의 전재산을 털어서 유비를 보좌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여동생과 혼인시켰으며, 그의 동생 미방은 서주 6개 현의 왕(王)에 해당하는 최고 권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미련없이 그 자리를 버리고 유비를 따랐다.
(미축도 정사와 달리 연의에서는 엄청나게 과소평가 되는 인물이다. 과장이 있더라도 미축 집안에서 일하는 하인만 2만여 명이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상당한 재력가였다. 게다가 무재도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활을 그렇게 잘 쐈다고. 다만 인자한 성격으로 병사를 지휘하는 것은 유비가 반대했다.
미방 역시도 부유한 서주의 권력자 중 한사람이었으나 연의에서는 관우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무능력한 인물로 그려놨다.)
여타 제갈량이나 손건, 조운, 간옹 등등 근거지가 없이 떠도는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유비를 따랐다.
이게 대단한 이유는 위에 서술한 인물들은 어느 진영에 가더라도 한 자리는 해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조조 역시도 저들에게 관직을 수여하면서 자신의 진영에 묶어놓을 생각을 했었고.
그러나 종래에는 유비를 따랐다는 것을 보면 유비가 저들에게 얼마나 큰 신뢰를 보여줬는지 유추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셋째로 천하 통일을 99% 완료한 조조에게 한 방 먹인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적벽에서 조조에게 크게 한방 먹이면서 조조의 천하 통일 의지를 좌절시키며 이전까지 공세의 입장이었던 조조는 수세로 돌아서게 된다.
2. 유비는 온화한 군주, 인자한 사람이었을까?
연의에서 유비의 모습은 한없이 착하기만 한, 어딘가 모자라 보이기까지 하는 이미지로 그려진다.그러나 정사에서는 정 반대의 모습이다.
연의에서는 평원군 현령 시절에 독우가 유비에게 횡포를 부리자 장비가 이를 보고 매질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독우를 두들겨 팬 건 유비이다.
게다가 정사에서는 거칠게 행동했다는 기록들도 있다고 한다.
또한 청년 시절에는 마을 청년들의 우두머리
또한 백성들에게 온화하게 대했을 거라고 하지만, 촉을 차지하고 토목공사나 금주령을 시행한게 유비이다.
법령도 빡빡하게 시행해서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도망갔다는 기록도 나온다.
3. 유비와 배신
윗글과 관련되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 '유비는 배신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그러나 유비는 배신을 많이 했다. 그것도 상당히 자주.
첫번째 배신의 대상은 공손찬이었다.
무명에 불과했던 유비가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준 것이 바로 공손찬이다.
자신의 휘하에서 싸우던 유비가 정계로 진출하도록 별부사마로 임명했으며, 평원에 군사를 주고 수비를 맡긴다.
이후 조조가 서주를 침공했을 때, 유비는 도겸에게 지원을 간다.
그러나 유비는 여기서 공손찬에게 돌아가지 않고 연락을 두절했으며 이후 공손찬에게 어떠한 말도 없이 서주목 자리를 차지한다.
이때 공손찬은 원소에게 신나게 털리고 있었으며, 유비는 공손찬이 망할 때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게 원소와 공손찬 대결 구도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이었는지, 공손찬의 수하였던 유비를 원소가 크게 칭찬했으며, 유비가 서주목에 오를 때 유비를 크게 지지했다는 것이다.
두번째 배신의 대상은 조조이다.
서주를 잃은 유비에게 좌장군이라는 직책을 수여하고 나갈 땐 유비와 같은 수레를 타고 다닐 정도였다.
근거지 없이 떠돌수밖에 없었던 유비를 파격적으로 대우했다.
그러나 이후 유비에게 군사를 주고 원술을 견제하도록 했으나, 오히려 서주를 침공하여 서주를 되찾는다.
물론 이후에는 조조의 대공세로 다시 서주를 잃고 원소에게 몸을 의탁하러 가게된다.
세번째 배신의 대상은 유장이다.
연의와 같은 소설에서는 '한의 부흥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포장하지만, 명백한 배신이다.
4. 유비가 저평가 된 것은 사실이다.
정리하면 유비는 굉장히 저평가 되어있다.관우, 장비처럼 무예가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제갈량처럼 군략에 밝은 것도 아니었으며, 유파나 장완처럼 내정을 다스리는 능력도 부족했다.
그러나 유비의 진정한 능력은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에 있었다.
유비의 대단한 점은 그 인재들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할줄 알았다는 것이다.
물론 조조나 손권이 인재를 막 굴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유비군은 저 둘과 상황 자체가 달랐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본거지없이 이곳저곳 유랑했었으며, 가시적인 불안 요소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와해되지 않고 끝까지 유비를 따랐으며,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행동을 할 줄 알았다.
일례로 제갈량이 반골의 상이라며 위연을 죽이려 했을 때, 유비는 그를 반대했으며 후에는 한중 태수로까지 임명한다.
그 당시 관중을 공략할 수 있는 지역인 한중은 유비군에게나, 조조군에게나 굉장히 중요한 요지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운이나 장비가 한중 태수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이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위연을 한중 태수로 임명한 것이다.
물론 위연은 그 직책에 걸맞게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으며, 유비가 죽을 때까지도 반란은 커녕 유비에게 충성을 다한다.
그러나 저평가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저평가를 하게 만든 것은 유비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관우, 장비 사후 촉의 전력을 동원한 이릉 대전을 일으켰다.
이는 그나마도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촉오 관계가 원수지간으로 돌아섰을뿐만 아니라, 촉의 인재들이 여기서 몰살당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엄청난 인적 손실을 가져왔다.
이는 이후 북벌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제갈량이 무려 다섯 차례나 북벌을 감행하고도 실패하게 된 이유라고 본다.
인재가 멸망하다시피한 총력전이다보니 도박적인 수는 거의 불가능했으며, 언제나 정공법으로 상대를 뚫어야 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유비가 최후의 승자였다면 유비는 결코 저평가되지 않았을 것이며 새로운 평가를 받지 않았을까 싶다.


하나 저기 틀린것은위연의 반골상은 연의상허구에요 위연의 군생활시작은 한현밑에 있던것이 아니라 유비의 형주군 휘하 직속병사출신입니다 그런데 유비가 거기서 위연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간부급으로 승진시켜 그것에 부응하듯 공을 세우며 역사에 나올수있게된것입니다 위연은 오호대장사후쯤 촉국하나만이 아닌 삼국최고명장급으로 이름날리는 수준까지되는 능력있는명장이죠 말년에 그이미지 다깎아먹어서그렇죠 유비가 직접 자기손으로 발굴한 흙속에 박힌 진주같은 인재는 위연입니다 그래서 장비관우조운 제갈량 과는 다른 큰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유비는 위연에겐 은인같은 존재로서 위연이 제갈량은 무시해도 유비에게는 한없는 충신이죠 그럴법도 한것이 말단에서 자기능력으로 인정받고 공을세워 장군 그리고 태수로 승진하는게 흔한케이스가 아니죠
답글삭제그렇네요. 말씀하신대로 위연 반골 상은 허구네요ㅠㅠ 저도 사실 관계를 제대로 확인하지않고 연의 내용을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글을 썼군요. 댓글로 써주신만큼 글은 수정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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