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8일 화요일

문명 5 : 멋진 신세계



2010년, 많은 게이머들을 타임리프를 시킨 게임, 문명이 다섯번째 시리즈를 발매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타임리프를 경험했다.
많은 고등학생들이 손댔다가 수능을 망쳤다는 경험담도 올라오곤 하며, 스타2 프로게이머는 문명때문에 대회를 불참하기도 했다.

문명이 이렇게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첫번째로 '나만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시대를 살면서 많은 문명들이 세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기록으로 보았고, 호사가들은 '만약에 이 때에 이 문명이 이러했더라면'이라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쓰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한다.

우리는 항상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상상을 하며 희열감을 느끼곤 한다.
만약 조선이 요동 반도를 소유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만약 미국이 영국에게 패배했다면 어땠을까?
만약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등등의 주제들로 상상을 하고 그림을 그려보지만, 그것을 현실화 시키기에는 너무 먼 이야기이다.

그러나 문명이라는 게임 안에서는 그것은 상상이 아닌 게임 내 현실로 다가온다.
게임 안에서 공산주의의 인디언들이 세계 최강의 패권국으로 군림하며 자유주의 약소국인 미국을 압박하는 시나리오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로 문명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자신이 플레이한 문명을 가지고 역사를 써내려가는 형식의 리뷰를 다수 볼 수 있다는 것은, 이러한 주장이 헛된 것이 아님을 반증해주는 증거이다.

두번째로는 역사적으로 등장했던 시스템들이 굉장히 현실적이고 세밀하게 구현되어 있다.
문화로 표현하는 게임 내 시스템은 내가 지금 플레이하는 문명을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할지를 결정한다.
어떤 문화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적은 수의 도시를 소유하고 내정에 치중하며 문명을 발전시킬수도 있고, 정복을 꿈꾸며 다른 국가와 전쟁을 하며 많은 도시를 소유하며 발전시킬수도 있다.
또한 개발사는 확장팩을 출시하며 좀 더 그러한 시스템들을 세밀하게 다루는 작업도 놓치지 않는다.
첫번째 확장팩인 '신과 왕'에서는 종교를 창시하고 스파이를 보내는 등의 첩보 시스템을 추가했다.
최근에 발매된 두번째 확장팩인 '멋진 신세계'에서는 고고학과 관광이라는 시스템을 추가하며 문화 승리가 진정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마지막으로는 과거 존재했던 문명들을 대부분 굉장히 훌륭하게 고증했다는데 있다.
문명의 특성, 특수 유닛, 특수 건물들이 등장하는데, 해당 문명의 유산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역사에 이입하여 게임을 즐기는데 이질감이 들지 않도록 구현해두었다.
한국 문명만 보더라도 화차와 거북선을 구현하며 한국의 색채를 살렸으며, 여타 다른 문명 역시 비슷하다.

문명을 선택해보자.

문명 5에 등장하는 문명들은 각자의 특징이 존재한다.
각자의 성격도, 특징도 다르지만 크게 두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는데 정복형 문명내정형 문명이다.

우선 정복형 문명은 꾸준히 전쟁을 하면서 이득을 얻어가고 그 이득을 바탕으로 승리하는 문명들을 말한다.
정복형 문명에 속하는 문명은 많이 해보질 않아서 자세한 플레이 방향을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특수 유닛에 따라 가장 강력한 타이밍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타이밍을 읽고 정복에 나서는 것이 관건이다.
보통 정복형 문명을 플레이하는 목적은 문화 승리나 지배 승리가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정복형 문명으로는 일본, 몽골, 훈족 등등이다.
저 셋은 초반부터 대놓고 침략할 의지를 드러낸다.

두번째는 내정형 문명인데, 내정형 문명은 과학 승리나 문화 승리, 외교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문명들이다.
물론 중후반에 폭발하는 과학력으로 정복형 문명이 될 수도 있으나, 난이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내정형으로 승리하는게 속이 편하다.
내정형 문명들은 참 많이 해보았는데,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과학 기술 개발하고 도시 국가의 우호도 높이는 등의 플레이가 상당히 재미있다.
특히 불가사의 경쟁하는게 내정형 문명의 백미가 아닌가 싶다.
1턴을 남기고 다른 문명에서 내가 짓던 불가사의를 지었을 때의 허탈함이나, 아슬아슬하게 내가 먼저 불가사의를 지었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한국 문명이 최근에 추가되었는데 한국 문명은 대표적인 내정형 문명이며 이하 쇼숀이나 인도 역시 내정형 문명이다.


세종의 위엄을 나타내주는 루리웹 유저의 캡쳐
한국의 특성은 사기라는 소리를 들을만큼 굉장히 좋은데다가, 기술 개발에 굉장한 시너지를 가지면서 남들이 중세 시대에 머물 때, 혼자서 르네상스, 산업 시대로 달려가는 문명이다.


문명을 건설해보자.

문명을 선택하고 시작하면 대부분 개척자 하나, 전사 하나가 주어진다.
쇼숀은 길잡이라는 특수 유닛이 주어진다.

먼저 개척자로 첫 도시를 건설하자.
한때 파이락시스 사에서도 논란이 되었던 '첫 턴에 개척자를 이동시켜서 도시를 지어야 하는가? 제자리에 지어야 하는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뜨거운 토론이 이어졌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동시키지 말고 짓는게 낫다고 생각한다.
후반에 어떤 자원이 나올지도 모르는데다가, 1턴 때문에 초반에 먹어야 될 불가사의를 놓치는 경우도 있다.
후반에 나오는 자원 때문에 도시를 하나 더 올려야 될 수도 있다. 오로지 그 자원 하나 때문에 나중에는 상당히 골치 아파질 수도 있다. 특히 다른 문명이 와서 그 자리에 도시를 지어버리면 외교로 교환을 해야하기 때문에 손해가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초반 불가사의는 1턴 때문에 놓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최대한 턴수를 아껴야 한다.

도시를 지었으면 전사는 멀뚱하고 놀고 있지 말고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탐색을 해보자.
그리고 최대한 많은 유적을 찾아서 획득하도록 하자.
유적 위로 유닛이 가면, 보상을 획득할 수 있는데 무료 기술도 제공하므로 최대한 빠르게, 많은 유적들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초반 정찰병은 굉장히 중요하다.
전사와 달리 언덕을 이동하는데 행동력을 소비하지 않기 때문에 좀 더 용이하게 넓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탐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초반에 정찰병 한 마리는 꼭 생산해두도록 하자.
또한 자동 탐색으로 탐색하는 사람도 있는데 자동 탐색으로 두면 야만족을 만나서 얼마 탐색도 못했는데 급사할 가능성이 높다.
초반에 자동 탐색은 왠만하면 꺼두자.

그 다음은 기술 개발과 불가사의 건설인데, 이것은 주변 자원 상황과 문명의 특성을 파악하고 지어야한다.
특히 불가사의 건설에는 꼭 필요한 것만 짓도록 하는 것이 좋은데 실패했을 때는 리스크가 상당하기 때문에이다.
그동안 불가사의를 지으면서 생산량에 따라 골드로 환산해주기는 하지만 그 보상은 미미한 수준이다.
간단한 팁을 주자면 정복, 확장형 플레이를 원한다면 제우스 상이나 피라미드를, 교역로를 통한 상업 플레이를 원한다면 거신상을, 빠른 기술 개발을 원한다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올리는 것이 좋다.

조금 쉽게 플레이할 수 있는 문명은 무엇일까?

과거 신과 왕 버전까지만 해도 정복형 문명이 내정형 문명보다 쉽고 재미있는 요소도 많았으나, 멋진 신세계에서는 내정형이 정복형 문명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AI 패치가 이루어지면서 잦은 전쟁을 하면 AI가 연합해서 공격을 하는 경우도 발생하기 때문에 과거처럼 무한 확장하기는 조금 힘든 부분도 있다.

첫번째로 추천하는 문명은 역시나 한국.
내정형 문명인 한국의 특성은 사기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굉장히 좋다.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내 전문가가 늘면 늘수록 기술 개발 속도가 엄청나다.
다른 문명이 창들고 싸울 때, 혼자 총들고 다니는 문명이기도 하다.
AI로 가만히 놔두면 위와 같은 상황을 맞이하기도 한다.
전통과 합리주의, 평등과 궁합이 잘 맞는 문명이다.

두번째는 쇼숀.
내정형 문명이긴 하지만 확장형의 성격이 강한 문명이다.
확장형 성격이 강한 이유는, 개척자가 도시를 지으면 다른 문명은 도시를 포함해서 총 7 블록을 먹는데 쇼숀은 8블록을 추가로 더 먹으면서 총 15블록을 먹는다.
게다가 특수 유닛인 길잡이는 유적을 탐사하면 유적 보너스를 선택해서 가져갈 수 있으며, 유적 업그레이드 시 궁병이 아닌 합성궁병으로 업그레이드 된다.
이것을 이용해서 초반에 2~3기 정도 업그레이드 시키고 명예를 하나만 찍은 후 야만족 사냥을 하면서 문화 포인트를 끌어모은다.
이 특성은 맵이 크면 클수록, 주위에 문명이 적으면 적을수록 엄청난 효율을 보여주는 문명이기도 하다.
내정형 문명임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궁합이 잘 맞으며, 체제 역시도 궁합이 상당히 잘 맞는다.
AI로 만나면 대부분 영토 크기 1위를 가뿐하게 찍어주는 문명이기도 하다.

마치며 

문명하러 가야지.

2014년 3월 31일 월요일

삼국지연의의 오해들3

4. 관우



신이 된 사나이명대에는 황제로까지 추대되었다.
소설의 내용을 현실에서 실행시킬 줄 아는 남자.
삼국지 최강의 무장.
지상 최강의 사나이한마 유지로.

어떤 표현을 써 붙여도 표현하기 참 부족하다.


관우를 잘 표현한 삼국지 12에 나오는 관우 일러스트이다.
관우에 대한 편견이지만 일러스트 역시도 관우의 얼굴은 붉은 대춧빛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붉은 빛이 감도는 까무잡잡한' 얼굴이었다고 한다.
왜 불그스름한 얼굴이 되어버렸는지는 의문.
또한 유비를 만나기 전까지는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소금 장사를 하다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다녔다고 하는 설이 있지만 이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1. 관우는 무결점 인간이었을까?

관우의 이미지 중 하나는 '뛰어난 학식'이다.
이것은 '춘추좌씨전을 가지고 다니며 틈틈히 읽었다'는 것 때문에 학식이 굉장히 깊은, 마치 '사색하는 파이터'와 같은 이미지로 그려진다.
연의에서도 그런 이미지만들기에 일조한 부분이 있는데 도원결의 이전에 관우가 했던 일은 아이들을 가르쳤던 훈장이었다.
코에이사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도 지력 80대로 초반 유비 진영에서 지력이 제일 높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관우가 학식이 깊었다는 이야기는 딱히 보이지 않는다.
춘추좌씨전 역시 그저 삶의 지침서 정도로 읽었을 뿐 학자의 눈으로 파고든 것은 아니라고 한다.

위와 연관되어 나오는 것은 인품이 출중하고 성격 또한 조용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성격이 상당히 급한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조조가 황제의 화살을 빼앗아 사냥감을 맞췄을 때,조조의 제장들이 모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조를 죽이려고 한다.
또한 입촉 후 마초가 유비에게 방자하게 굴자 관우는 그것을 보고 크게 화를 내며 마초를 죽이려고 한다.
반대로 장비는 객장으로써 응당 예를 갖추어야 한다며 침착한 모습을 보인다.
이런 점들을 보았을 때 실제 관우의 성격은 상당히 난폭했다.

연의에서는 군략에 밝아 뛰어난 지휘관으로 그려지지만, 이것마저도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지휘관으로써는 승보다 패가 훨씬 많은 정도이며, 관우가 뛰어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드는 예로는 번성 전투가 있으나 결국 형주 전체를 잃었다.
사실 번성 전투마저도 물난리로 인해 우세한 형국으로 시작했으나 결과는 결국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났다.

2. 관우는 왜 만인지적인가?

일부 순위매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관우의 무가 정말 뛰어난 것이 맞는지 의문을 던진다.
그것도 소설인 연의를 보고.
우선 소설에서는 일기토가 자주 나오는데 반하여 실제 정사에서는 일기토가 거의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쟁은 집단 대 집단으로 붙는 상황이며 어떤 명분도 이득도 없는 개인전을 치룰 이유가 없다.
삼국지연의 최강 무장으로 불리는 여포도 일기토 기록이 있다.
그러나 관우가 대단한 이유는 연의의 내용이 실제 정사에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관도 대전에서 안량이 있는 곳까지 단신으로 뚫고 들어가 안량의 목을 가져온다.
실제 정사에서는 추가로 '상당히 많은 병사들 사이에 있는'이라는 설명까지 달아준다.

또한 그 당시 사람들의 평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앞서 유비에 대해 이야기하며 말했던정욱전, 유엽전, 여몽전, 주유전 등에서도 관우와 장비를 엄청난 용맹을 가진 대단한 장수라고 표현한다.

관우의 무에 대해서는 딱히 잡설을 붙이지 않아도 대단한 장수였다.

3. 제갈량과는 사이가 정말 좋지 않았을까?

유비가 제갈량을 데려온 이후로 제갈량과 함께 다니는 것을 즐기자, 장비와 관우가 불만을 품고 저런 서생을 귀히 대접하는지 유비에게 물었다.
그러자 유비는 '나와 제갈량은 물과 물고기 같은 관계이다.'라며 제갈량의 소중함을 표현했다.

이는 수어지교의 고사이며, 여기서 관우와 장비는 제갈량을 탐탁치않게 생각한다는 뉘앙스를 비춘다.
물론 이것은 연의의 창작이다.

이런 연의의 창작을 믿고는 제갈량이 일부러 관우가 죽게 내버려뒀다고 하는 말도 안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유비와 제갈량은 관우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파촉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관우를 위해 병력을 이끌고 형주를 지원갈 수 없었기 때문에 유봉과 맹달을 상용에 배치함으로써 언제든 관우가 위험할 때 지원을 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실제로 관우는 여러 차례 상용에 있는 병력에 구원 요청을 하였다.
그러나 유봉과 맹달의 갈등으로 인해 구원이 제대로 가지 않았고 결국 관우가 죽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유봉은 유비에게 사형에 처해졌고, 맹달은 처벌이 두려워 위로 투항하게 된다.

실제로 관우와 제갈량의 정치적 관점에서 대립을 보이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제갈량은 촉한 내에서 대표적인 친오파였고, 관우는 오나라에 강경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입장에서 그랬을 뿐 실제로는 개인적인 편지까지 주고 받았으며 제갈량은 관우에게 미염이라는 별명까지 붙여서 불렀을 정도다.

4. 간단히

관우가 이렇게 신격화까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의리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비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유비의 처자식을 챙겨 보살폈으며, 조조에게 엄청난 대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비의 거처를 알자 모든 것을 버리고 유비에게 떠난 것이다.
이는 부모와 형제마저도 버리는 난세에, 입으로 떠드는 '의'가 아닌 진정 실천으로 보여준 것이기에 더 큰 충격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어떻게 보면 유교의 맥락과 어울려 유교적 사회에서 관우의 행동은 더욱 빛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5. 장비


영화 적벽대전에 등장하는 장비의 모습이다.
고래로 장비의 모습은 저와 다를 바 없었다.
밤송이처럼 뻗힌 수염, 큰 눈과 짙은 눈썹으로 표현된다.
연의의 묘사대로 장비를 그리면 불교의 사대천왕과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실제로 상당히 닮은 모습이다.


1. 연의의 장비는 정사에서의 장비를 얼마나 반영하였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연의에서의 모습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사와는 전혀 딴판이다.
다시 말하면 연의의 장비는 실존했던 장비의 이름만 갖다 썼을 뿐 100% 창작된 허구의 인물이라는 말이다.

먼저, 험상궃은 외모.
정사에서 장비의 외모에 대해 왈가왈부한 적은 없으나 장비의 딸이 상당히 아름다웠다고 한다.
딸은 아버지를 닮는다는 연구결과가 있으며 실제로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장비의 딸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는 거꾸로 생각하면 장비의 외모도 상당히 준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딸이 못생겼다면 아무리 개국공신의 딸이라도 황후가 될 수 있었을까?
그것도 두 명 모두 말이다.
생각해보니 유선이 나쁜 놈이다. 자매를...

다음은 일자무식 + 군략도 모르는 장수에 대한 이미지.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삼국지 정사에서 장비만큼 완벽한 장수도 없다단언컨대, 장비는 가장 완벽한 장수입니다.
앞서 말했지만 관우와 함께 만인지적으로 불렸을 뿐더러, 군략으로 위나라의 명장인 장합을 한중에서 관광시켜 버린다.
더욱 대단한 것은 장합 군세에 비해 군사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산길에서 앞뒤로 포위한 뒤 쌈싸먹어 버린 것.
엄안을 사로잡는 부분도 연의에서는 소가 뒷걸음치다 쥐잡는 것마냥 설명했지만 그럴 능력이 이미 충분했던 장수였다.
연의에서는 초반에 술에 취해 하비성을 빼앗기는 부분마저도 창작이라고 쓰고 날조라고 읽는다이며, 상관인 조표가 여포와 내통했기 때문에 성을 빼앗긴 것이다.

마지막으로 백정 이미지.
연의에서는 푸줏간을 하며 고기를 팔았다고 하는데, 상인 집안이긴 하나 백정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상당히 잘 나가는 상인 집안으로 상당한 교육까지 받았으며, 사대부로써 군자를 우러르고 예를 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예를 모르는 이(소인)는 옆에 두고 혹독하게 대했으며, 이는 모질어서가 아닌 그를 교화시킬 목적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이것으로 말미암아 범강과 장달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오죽하면 동시대 촉에서 벼슬했으며 삼국지를 쓴 진수가 '국사의 풍도가 있었다'는 평을 했을까?
진수의 삼국지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와 다르다.

실제 성격에 대해서는 정사에 기록된 바 없으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선비들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2. 장비는 로리콘이었을까?

이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위략의 기록이다.
서주에서 세력을 잃고 여남을 떠돌 때, 땔나무를 주우러 온 여아를 보고는 납치해서 겁탈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충격적인 것은 그 여자 아이가 하후연이 맡아서 기르던 조카딸이었다.
나이 차이도 상당하다. 정확한 나이는 추정할 수 없으나 장비는 30~31세에 아내는 10대 중후반으로 추정한다.
이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 바로 '장비는 로리콘이다'라는 설이다.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기록된 사서가 위략이라는 것이다.
위략은 촉에 대해 상당히 나쁘게 적어놔서 그 진실성을 의심받는 사서이기도 하다.
위략의 기록이 얼마나 허황된지 알 수 있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유선 벤허설.
유선이 소패에서 한중으로 팔려갔고, 나중에 아버지를 알고 찾아가는 내용이 위략에 당당하게 적혀있다. 자세한 것은 유선 벤허설에 대해서 검색해 보시길.

게다가 중요한 것은 위략에서 말하는 저 시기에 하후연은 진류 태수로 있었다.
하후연이 맡아서 기르는 아이가 어떻게, 그리고 왜 여남까지 가서 땔나무를 주웠는지는 미스테리이다.
판단은 스스로 해보시기 바란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사에서는 연의와 달리 문무를 겸비했으며, 얼굴까지 잘 생긴 완벽한 엄친아의 표본이다.
어린 아내까지 얻은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
그러나 오히려 완벽하지 않고 언제나 실수만 저지르는좋은 의도로 했지만그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고 형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그 막내 동생같은 이미지로 인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만약 삼국지연의의 장비의 모습이 정사와 마찬가지로 엄친아의 모습이었다면 장비가 이런 인기를 끌 수 있었을까?
비록 연의에서의 모습으로 인해 정사에서의 장비의 모습은 없더라도 사람들이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은, 나관중의 창작을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삼국지연의의 오해들2

3. 유비


유비하면 관우, 장비와 함께 '복숭아 나무 아래에서 형제가 되기로 맹세'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도원결의를 맺었다는 기록은 정사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 맺어진 형제'라는 기록은 자주 등장하며 장비가 관우를 형처럼 모시고 유비의 의제라는 기록이 있다.
도원결의는 허구가 맞긴 한데, 이들이 의형제였다는 것은 기정 사실로 여겨진다.

1. 유비는 정말 무능력한 군주였을까?

여러모로 조조와 대비가 되는 인물이다.
천하를 통일하는 기반을 99%까지 닦아놓은적벽에서 승리만 했어도...조조와 달리, 주위에 최강무장들을 거느리고도 빌빌대는 모습은 유비 무능력설에 힘을 실어준다.

그러나 일면을 살펴보면 그 시대의 영웅임은 사실이다.

첫째로, 유비는 말그대로 '빈손'에서 시작한 인물이다.
황족이라는게 엄청난 메리트로 작용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들도 있지만, 진성 황족들이었던 유주자사였던 유우도 부하 공손찬에게 목이 잘려나갔으며, 양주자사였던 유요도 손책에게 쫓겨다녔다.
게다가 유비는 전한시대에 내려온 계보인데다가 방계이다.
후한시대에는 전한시대의 황족을 대우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황족의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돗자리짜고 신발팔면서 하루하루 연명하던 하류 계급이었다.
말 그대로 자금도, 근거지도 없어 전전하던 인물이었다.

둘째로 항상 그의 주위에 인재들이 붙어있었다는 것이다.
삼국지 정사 최강의 무장 1번 관우는 천하의 절반을 차지한 조조의 후한 대접에도 그것을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유비를 따랐다.
삼국지 정사 최강의 무장 2번 장비 역시 유비와 떨어졌음에도 끝끝내 유비를 찾아 그를 따른다.

(삼국지 정사 최강 무장들이라는 소리는 결코 근거없는 소리가 아니다. 관우는 병사들을 단신으로 뚫고 들어가서 지휘관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장비의 장판파에서 단신으로 5천명의 병사를 막아선 것도 정사에 기록된 사실이다.
정욱전에서 나오는 '만인지적'이라는 칭호는 오직 관우와 장비에게만 부여된 칭호이다.)

서주 최고의 부자인 미축은 자신의 전재산을 털어서 유비를 보좌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여동생과 혼인시켰으며, 그의 동생 미방은 서주 6개 현의 왕(王)에 해당하는 최고 권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미련없이 그 자리를 버리고 유비를 따랐다.

(미축도 정사와 달리 연의에서는 엄청나게 과소평가 되는 인물이다. 과장이 있더라도 미축 집안에서 일하는 하인만 2만여 명이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상당한 재력가였다. 게다가 무재도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활을 그렇게 잘 쐈다고. 다만 인자한 성격으로 병사를 지휘하는 것은 유비가 반대했다.
미방 역시도 부유한 서주의 권력자 중 한사람이었으나 연의에서는 관우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무능력한 인물로 그려놨다.)

여타 제갈량이나 손건, 조운, 간옹 등등 근거지가 없이 떠도는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유비를 따랐다.
이게 대단한 이유는 위에 서술한 인물들은 어느 진영에 가더라도 한 자리는 해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조조 역시도 저들에게 관직을 수여하면서 자신의 진영에 묶어놓을 생각을 했었고.
그러나 종래에는 유비를 따랐다는 것을 보면 유비가 저들에게 얼마나 큰 신뢰를 보여줬는지 유추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셋째로 천하 통일을 99% 완료한 조조에게 한 방 먹인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적벽에서 조조에게 크게 한방 먹이면서 조조의 천하 통일 의지를 좌절시키며 이전까지 공세의 입장이었던 조조는 수세로 돌아서게 된다.


2. 유비는 온화한 군주, 인자한 사람이었을까?

연의에서 유비의 모습은 한없이 착하기만 한, 어딘가 모자라 보이기까지 하는 이미지로 그려진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정 반대의 모습이다.

연의에서는 평원군 현령 시절에 독우가 유비에게 횡포를 부리자 장비가 이를 보고 매질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독우를 두들겨 팬 건 유비이다.
게다가 정사에서는 거칠게 행동했다는 기록들도 있다고 한다.
또한 청년 시절에는 마을 청년들의 우두머리라고 쓰고 건달 두목이라고 읽는다이기도 했으며, 자존심 쎈 관우와 거칠기로 소문난 장비에게 대놓고 혼냈다고 한다.

또한 백성들에게 온화하게 대했을 거라고 하지만, 촉을 차지하고 토목공사나 금주령을 시행한게 유비이다.
법령도 빡빡하게 시행해서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도망갔다는 기록도 나온다.




이런 이미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창천항로에 나오는 유비의 모습이다.
조조 중심의 삼국지를 그렸다.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작품.


3. 유비와 배신

윗글과 관련되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 '유비는 배신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유비는 배신을 많이 했다. 그것도 상당히 자주.

첫번째 배신의 대상은 공손찬이었다.
무명에 불과했던 유비가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준 것이 바로 공손찬이다.
자신의 휘하에서 싸우던 유비가 정계로 진출하도록 별부사마로 임명했으며, 평원에 군사를 주고 수비를 맡긴다.
이후 조조가 서주를 침공했을 때, 유비는 도겸에게 지원을 간다.
그러나 유비는 여기서 공손찬에게 돌아가지 않고 연락을 두절했으며 이후 공손찬에게 어떠한 말도 없이 서주목 자리를 차지한다.
이때 공손찬은 원소에게 신나게 털리고 있었으며, 유비는 공손찬이 망할 때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게 원소와 공손찬 대결 구도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이었는지, 공손찬의 수하였던 유비를 원소가 크게 칭찬했으며, 유비가 서주목에 오를 때 유비를 크게 지지했다는 것이다.

두번째 배신의 대상은 조조이다.
서주를 잃은 유비에게 좌장군이라는 직책을 수여하고 나갈 땐 유비와 같은 수레를 타고 다닐 정도였다.
근거지 없이 떠돌수밖에 없었던 유비를 파격적으로 대우했다.
그러나 이후 유비에게 군사를 주고 원술을 견제하도록 했으나, 오히려 서주를 침공하여 서주를 되찾는다.
물론 이후에는 조조의 대공세로 다시 서주를 잃고 원소에게 몸을 의탁하러 가게된다.

세번째 배신의 대상은 유장이다.
연의와 같은 소설에서는 '한의 부흥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포장하지만, 명백한 배신이다.


4. 유비가 저평가 된 것은 사실이다.

정리하면 유비는 굉장히 저평가 되어있다.
관우, 장비처럼 무예가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제갈량처럼 군략에 밝은 것도 아니었으며, 유파나 장완처럼 내정을 다스리는 능력도 부족했다.
그러나 유비의 진정한 능력은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에 있었다.
유비의 대단한 점은 그 인재들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할줄 알았다는 것이다.
물론 조조나 손권이 인재를 막 굴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유비군은 저 둘과 상황 자체가 달랐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본거지없이 이곳저곳 유랑했었으며, 가시적인 불안 요소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와해되지 않고 끝까지 유비를 따랐으며,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행동을 할 줄 알았다.
일례로 제갈량이 반골의 상이라며 위연을 죽이려 했을 때, 유비는 그를 반대했으며 후에는 한중 태수로까지 임명한다.
그 당시 관중을 공략할 수 있는 지역인 한중은 유비군에게나, 조조군에게나 굉장히 중요한 요지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운이나 장비가 한중 태수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이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위연을 한중 태수로 임명한 것이다.
물론 위연은 그 직책에 걸맞게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으며, 유비가 죽을 때까지도 반란은 커녕 유비에게 충성을 다한다.

그러나 저평가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저평가를 하게 만든 것은 유비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관우, 장비 사후 촉의 전력을 동원한 이릉 대전을 일으켰다.
이는 그나마도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촉오 관계가 원수지간으로 돌아섰을뿐만 아니라, 촉의 인재들이 여기서 몰살당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엄청난 인적 손실을 가져왔다.

이는 이후 북벌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제갈량이 무려 다섯 차례나 북벌을 감행하고도 실패하게 된 이유라고 본다.
인재가 멸망하다시피한 총력전이다보니 도박적인 수는 거의 불가능했으며, 언제나 정공법으로 상대를 뚫어야 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유비가 최후의 승자였다면 유비는 결코 저평가되지 않았을 것이며 새로운 평가를 받지 않았을까 싶다.

2014년 3월 25일 화요일

삼국지연의의 오해들 1

1. 조조



난세의 간웅, 치세의 능신.
영화 적벽대전에 나오는 조조 역할로 나오는 배우의 모습과 흡사하다.



조조의 평가는 굉장히 극단적이다.
과거, 그러니까 이문열 삼국지가 베스트셀러에 오르기 전만 해도 '간사함'의 대명사였다.
왕조 시대에 용납되기 힘든 반역자였고, 황권을 철저하게 이용하며 자신의 이득을 챙겨가기까지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이문열의 뛰어난 포장으로 인해능력을 중시하는 이상적인 군주의 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본인 역시 상당히 뛰어난 능력자로 평가된다.
실제로 조조의 리더쉽을 재조명하며 많은 책들이 출간되기도 했다.

이는 삼국시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도 나타나는데, 게임 내에서도 몇 없는 모든 능력치가 90 중후반을 찍는 만능형 무장으로 나온다.

1. 과연 조조는 자신의 능력만으로 그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조조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오해는 맨땅에서 시작해서 제국을 일궈냈다고 한다.
실제로 반동탁연합 이후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조조 가문의 위상을 살펴보았을 때, 결코 빈손으로 시작할 수 없었다.
삼국지연의에서도 나오지만 조조의 할아버지는 조등이다.
해석하기에 따라 조조의 가문이 비천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조등은 그 시대의 권력자 중 하나였다.
무려 6명의 황제를 섬겼으며, 외척 세력이 황제 옹립에 관여할 때 조등의 권력으로 외척의 계획을 저지시킨 인물이다.

이러한 가문 배경 덕택에 원소와는 달리어린 시절부터 탱자탱자 놀아제낀 조조는 스무살부터 무.난.하.게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낙양 북문 경비대장 시절에 십상시의 친척을 처벌하고도 무사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삼공 중 한명이었던 왕윤은 이전에 조조와 비슷한 짓을 했다가 십상시에게 보복을 받고 죽을 뻔 했다.

또한 반동탁연합에 참여할 당시만해도 무려 5천여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동탁이 낙양에 불을 지르고 도망갈 때, 반동탁연합의 제후들은 추격을 하지 않았다.
조조는 자신의 독단으로 동탁을 추격하였으나, 오히려 동탁의 반격으로 5천의 병력이 궤멸하게 된다.

즉, 빈손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조조의 선택이었다.

오히려 그에게는 상당한 행운이 뒤따랐다.
그 당시 황건적에 의해 연주목이었던 유대가 죽게 되었고, 그에 따라 연주가 빈 땅이 되었다.
이때 유대의 부하인 포신과 진궁이 조조에게 연주를 갖다 바치고 조조는 연주를 거의 공짜로 차지하게 된다.
그 당시 연주는 인구와 생산량이 높았던 지역 중 세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지역이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봤을 때 조조는 결코 맨땅에서 시작한 인물이 아니다.
정말로 맨땅에서 시작한건 손견, 유비 둘 정도뿐이다.

2. 서주 대학살

도겸의 병사들이 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을 살해하자, 조조는 서주를 침공한다.
그러나 도겸이 지키는 서주를 공략하지 못하고 애꿏은 양민만 수십만을 학살한다.
그당시 물산이 풍부하고 인구만 100만 정도 된다고 기록된 서주가 황폐화 될 정도 였다고 하니 어느 정도 였는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물론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에 자식의 도리로 복수를 했다는 의견이 있을지도 모르나, 양민의 수십만의 목숨 역시도 가벼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주를 황폐화 시킬 정도로 철처하게 파괴한 조조의 잔혹성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훗날의 일이기도 하며,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서주 대학살이 없었다면 오와의 전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원소



연의에서 그려진 원소의 이미지는 찌질 그 자체이다.
가문빨로 올라가서는 능력도 없고 결단력도 부족하고, 라이벌이라고 쓰고 천적이라고 읽는인 조조에게는 항상 몇 수씩 뒤쳐지고, 결국에는 자신이 일궈놨던 땅까지도 조조에게 통째로 빼앗기는 '조금 모자란' 인물로 비춰진다.

그런데 정말 원소가 그렇게 모자란 인물이었을까?

1. 원소는 가문빨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아니다.
연의에서 캐릭터성을 부여하려고 작정을 했는지 나관중은 처음부터 끝까지 원소에게 '사세삼공'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사세삼공이라는 표현이 굉장히 애매한게, 원소는 사생아이다.
그것도 어머니가 노예인 사생아.
연의에서는 사촌으로 나오는 원술이 적자출신의 배다른 형제이다.
즉, '사세삼공 가문'이라는 표현은 원소보다 원술에게 더 적합한 표현이다.

어찌되었든 원소는 가문에 입적되어 자라기는 하였지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이런 원소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당시 시류를 파악하고 소외되었던 청류파를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소가 청류파에 뒷작업을 했던 시기는 황건의 난이 일어나기 전이었는데, 황건난이 일어나며 과거 청류파 인사들의 수배가 풀리게 되었고, 이전부터 꾸준히 '작업'을 해온 원소는 이들을 대거 자신의 밑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원소의 결단력에 대해서는 십상시가 하진을 죽였을 때 그 상황에 내렸던 판단을 들 수 있겠다.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환관세력에 선공을 가해 그 세력들을 축출해버린 것을 보면 결단력이 떨어지는 인물도 아니다.

정리하자면 원소는 오히려 상당한 능력을 가진 영웅이라고 표현하는게 맞다.

2. 원소는 왜 황제를 옹립하지 않았을까?

하북을 평정하면서 가장 부유한 4주(기주, 유주, 병주, 청주)를 소유한 원소에게 저수가 낙양에 있는 황제를 옹립하라고 권하지만 그 말을 듣지 않는다.
그리고 원소에 비해 세력이 비루한 조조는 황제를 옹립하고 그 세력이 점점 확장되었고, 두 세력이 충돌하게 된다.

이것은 관도대전이 일어나기 전, 조조와 원소의 상황이다.

그 당시 조조는 원소에 비하면 작은 세력에 불과했다.
여포, 원술, 도겸 등에게 치이며 연주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던 조조와는 달리 원소는 중원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구가 많은 4주를 통일한 제후였다.
그러나 황제를 옹립한 조조는 그것을 이용해 관리들을 자신의 세력 아래두어 결국에는 연주, 예주, 서주를 손에 넣고 관도에서 원소를 패퇴시키면서 천하통일의 기반을 닦게 되었다.

이것을 보며 사람들은 원소가 참 무능력하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원소는 왜 황제를 옹립하지 않았을까?

이미 원소는 처음부터 헌제를 황제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관동까지 올라온 제후들에게 동탁은 군대를 해산하라고 황제의 명으로 칙사를 보낸다.
그러나 원소를 그런 칙사를 죽여 볶음을 만들어 버린다.(...)
엽기적인 행동이기도 행동이지만 원소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바로 헌제의 정통성을 문제로 들며 헌제는 황제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유인즉, 동탁은 전 황제(소제)를 살해한 역적임과 동시에 그 역적인 동탁에 의해 임명된 황제라는 점을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황제를 추대했는데 황실 정통성에 가장 근접한 유우를 추대했으며, 많은 제후들이 그 의견에 동의했다.
삼국지에 계의 제후인 그 유우가 맞다.
그만큼 한황실의 권위가 떨어져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하다.

결국 조조와 원술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제후들이 원소 의견에 찬성표를 던졌고 유우가 황제에 오르기 직전까지 계획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유우 본인이 완강하게 거절하며 결국 그 계획은 불발이 되고 어영부영하다 결국에는 반동탁연합을 해산하게 된다.

유우는 유우 나름대로 이렇게 사람들을 다스리면 헌제에게 충성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미 후한의 체제가 붕괴된 상황에서 이러한 결정은 오히려 독이 되었고 결국 제후들의 군벌화를 가속시키며 군웅할거 시대를 열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원소만의 생각이었고, 여전히 한 황실을 따르는 인물들이 대다수였다는 점에서 원소의 결정은 일생일대의 가장 큰 실수로 작용하였다.

3. 그외에는 

그의 외모를 표현하길 자모위용, 빼어난 용모에 위엄이 서려있다고 표현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잘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지에서 표현되는 걸 보면


남자답게 생기긴 했는데 자모위용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심지어는 이렇게도 그려놨다.(일간스포츠 기사)

조조 생에 가장 큰 라이벌은 원소였다.
원소와 전쟁을 하기 전에도 원소를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원소를 얼마나 의식하고 있었는지 무제기에서 원소를 언급한건 120여 회라고 한다.
조조의 가장 큰 라이벌이었던 유비는 60여회, 손권은 20여회 정도 언급된다고 한다.

정리하면 정사에서 좆밥취급 당할 정도로 무능력한 인물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굉장히 과소평가받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